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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시, 음악, 무용,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과 업적으로 명성을 얻은 그녀 황진이 그녀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음과 동시에 명성을 떨친 기생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의 삶에 대해 들여다보기 위해 출생부터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황진이

    황진이는 1506년 조선 경기도 개성부에서 출생하였고 진랑, 명월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그녀의 출생에 대한 정확한 세부 사항은 잘 기록되어 있지 않아 역사적 기록과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로 그녀에 대해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녀는 개성에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서녀였으며 어머니 또한 기생이나 천민 출신일 것으로 추축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황진이는 양반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당시의 조선 신분제인 종모법에 따라 천출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시각장애가 있는 천민으로 그녀는 홀어머니와 함께 자랐지만 양반가 못지않게 8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학문을 익히고 배운 것으로 미루어보아 물질적으로는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의 해석도 존재합니다. 재정적 어려움이 있는 가정에서 자랐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 기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여 그녀를 기생 훈련원에 보내지게 되고 그곳에서 음악, 춤, 시, 회화등 다양한 예술에 능통한 고도의 훈련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렇듯 황진이의 출생부터 기생 이전까지의 어릴 적 이야기는 잘 알려진 바가 없기에 다양한 이야기로 해석되고 만들어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기생 황진이

    황진이가 기생이 된 이유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시각장애인이던 어머니가 기녀 출신이다라는 설과 서민출신의 어려운 가정 때문인 설, 짝사랑하던 남성의 존재를 알게 된 설 등 영화나 드라마에서 각각의 다양한 시선으로 해석된 오고 있습니다. 가장 드라마틱한 설은 아마도 그녀를 사랑하던 한 도령이 상사병에 걸려 죽게 되며 장례가 치러지는 과정 중에 도령의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을 지날 때 멈춰서 버고 이때 황진이가 속적삼을 상여 위에 올리자 비로소 그 멈췄던 상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찌하였든 기생의 길에 들어선 황진이의 기생 이름은 명월으로 그녀는 시인이자 서예가, 작가, 사상가, 화가, 무용가로 다방면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8살 천자문을 떼기 시작함은 물론 웬만한 고전을 읽어내고 한시를 지을 정도로 명석함을 보였기에 이는 당연한듯합니다. 정말 요즘말로 다재다능한 연예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황진이는 이러한 뛰어난 재능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미모 또한 겸비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매혹적이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최면에 빠질 정도라고 표현되기도 하는데요 섬세한 이목구비, 결점 없는 피부, 표정이 풍부한 눈, 우아한 움직임을 지닌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기생의 길로 들어서며 교육되고 다듬어지며 우아함, 균형감은 매력으로 더욱 강화되어 당대 남성들 사이에서 매혹과 욕망의 상징이 됩니다. 황진이의 아름다움은 단순한 외모를 넘어선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다방면으로 재능을 갖고 거기에 수려한 외모까지 더해지니 내면과 외면을 모두 아우르는 한국역사의 문화적 아이콘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황진이의 남자들

    그렇게 내면과 외면으로 훌륭함을 장착한 황진이기에 당시 많은 선비들은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 자체가 자랑거리였을 것입니다. 이것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그 이야기 중에 하나가 서경덕과의 일화 일 것입니다. 서경덕을 만나기 전 황진이는 지족선사(지족암에서 30여 년 동안 수도에 정진한 생불)를 만나며 결국 지족선사는 파계시키 장본인으로 남게 됩니다. 그 후 황진이는 서경덕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데 그는 문학적 재능과 지적인 추구로 유명한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시인이었습니다. 그런 서경덕을 황진이는 사랑하였고 그럼에도 불구 신분이 다르다는 이유, 서경덕의 강직함의 이유로 그들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다음 사대부이자 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긴 이종숙과 연인으로 지냈었고, 관료이자 뛰어난 학자인 이사종과도 깊고 뜨거운 관계를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사종과의 만남은 계급과 지위의 장벽을 초월한 만남으로 많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 후 황진이는 다시금 지족선사를 찾아가 그를 유혹하는 등 그녀의 남자들을 향한 행보는 거침이 없었습니다.

    죽음과 사후의 황진이

    만인의 여인 황진이의 죽음에 대해선 민간 설화에 얽혀 있으며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한 가지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스스로 강에 빠져 죽음을 선택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기생이라는 사회적 지위의 제약으로 인해 비탄이나 환멸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설입니다. 그 당시 황진이는 "내가 죽거든 관을 쓰지 말고 동문 밖 개울에 두어 여인들로 하여금 경계로 해주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져 오기도 합니다.  그녀가 남긴 작품으로는 박연폭포시, 영초월시, 등만월대회고, 청산리 벽계수야등 한시와 시조가 있습니다. 재능이 있고 독립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여성성의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그녀가 남긴 유산은 계속해서 문학계에 영감을 주는 작품으로 남게 됩니다.

     

    황진이의 일화룬 다룬 영화나 드라마가 많은 것은 그만큼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거나 화재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려를 다룬 영화로는 1957년 도금봉 주연의 영화, 2007년 송혜교 주연의 영화가 있었으며 드라마로는 2006년 KBS에서 제작 "나황진이"를 각색 하지원 주연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이밖에 여러 편의 소설로도 그녀에 대해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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