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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은 우리들의 역사에서 충격적인 시기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일본침략을 겪어온 우리로서는 현재까지도 문화적 역사적 불편함의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실상 일본의 침략은 광범위한 파괴, 인명손실 그리고 사회 질서의 붕괴로 연결되어 우리에게 큰 피해를 남기게 됩니다. 우리는 임진왜란 당시 이러한 침략을 물리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중 이순신 장군과 다른 지도자들의 영웅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일본의 침략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의 활약 중 3대 해상 전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의 침략 임진왜란

    임진왜란(1592 ~ 1598)이란 임진년에 일어난 왜국의 난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일본, 한국, 그리고 중국을 포함한 갈등이었습니다. 임진왜란 전쟁은 일본이 명나라를 정복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여 일본의 군주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시작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6세기 후반 일본의 군사 및 정치 지도자로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동아시에서 패권을 확립하려 했습니다. 그의 야심에는 명나라(중국) 정복이 포함되어 있었고 명나라 정복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조선(한국)을 정복해 이를 디딤돌로 삼으려 했습니다. 이 전쟁은 이렇게 관련된 세 나라에 중대한 군사적 개입과 정치의 발전등에 중대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 1952년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 중 한 명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가능성이 있다고 의견을 내놓지만 이와 반대되는 의견으로 결국 전쟁 준비를 하지 않기로 결정이 되면서 방관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과 다르게 일본 왜군은 1592년 4월 13일 700여 척의 배를 끌고 조선을 침략하게 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대륙의 정복을 위해 처음에는 조선에 명을(중국) 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했으나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결국 쳐들어 온 것입니다. 왜군(일본 군사)은 먼저 부산 앞바다를 침략해 왔는데 이때 부산바다를 지키는 우리 군은 이를 막아내지 못하고 패배하고 맙니다. 이 일로 조선의 장군인 신립은 전술에 실패하며 스스로 강물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후 왜군은 충청북도에 위치한 충주까지 점령해 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왜군은 계속해서 육로 및 해상을 통해 조선을 침략하게 되며 일본의 침략 임진왜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활약

    이 시기에 활약한 장수로는 임진왜란 초기 권율, 곽재우, 김시민 등 장수들이 있었지만 장장 7년여간의 긴 전쟁이었기에 대부분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이에 조선의 왕인 선조(재임기간 1522 ~ 1608)는 원나라(중국)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명나라는 이에 응답하여 이여송을 필두로 진린, 마귀, 양호, 유정, 송응창, 심유경 등 1만여 명의 군대를 파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원나라의 지원에도 이순신 장군의 외롭고 긴 싸움은 계속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모든 해상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일등공신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동안 조선을 방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전략적 탁월함, 혁신적인 해상 전술, 그리고 나라를 지키기 위한 변함없는 헌신은 그를 한국 군사 역사의 중심인물로 기억되게 하기에 손상이 없었습니다. 1545년부터 무신이었던 이순신은 임진왜란 이전에도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며 뛰어난 군 경력을 다져오고 있었던 터였 임인왜란 초기에는 왜군(일본군)의 침략이 우세한 방향으로 흘러가 서울을 빠르게 점령하고 남하하게 됩니다. 일본을 다녀온 통신사의 침략 우려에 대한 목소리가 있었음에도 조선해군은 침략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이로 인해 일본군은 임진왜란 최기 해군의 지배력을 얻게 됩니다. 1545년에 태어난 이순신은 임진왜란 이전에도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며 뛰어난 군경력을 다져 명성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시절 임진왜란이 시작되고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어 지도자가 되어 군을 이끌어가게 됩니다.

    3대 해상전투와 전략

    임진왜란의 3대 전투를 꼽자면 한산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이번에 다룰 내용은 해상에서의 3대 전투에 대해 다뤄보고자 합니다. 이순신은 혁신적인 전술로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가기 우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거북선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일본의 공격을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진 장갑이 두터운 전함인 거북선을 사용하는 것을 포함하여 혁신적인 해군 전술을 시행하고 수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을 여러 차례 물리치는 업적을 남기게 됩니다. 이순신 장군은 수적으로 불리한 우리 군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지리적 전술을 훌륭하게 활용한 것으로 유명한데 중요 3대 해상전투와 전략에 대해 들어다 보도록 하겠습니다. 3대 해상 전투 중 첫 번째로는 뛰어난 학익진 전술로 유명한 1592년 한산 대첩, 두 번째는 해상의 조류를 전략적으로 잘 활용해 수적으로 불리했던 전투를 승리로 이끈 1597년 10월 명량해전, 세 번째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이후 벌여지는 해상전투로 안타깝게도 이순신장군의 마지막 전투인 1597년 12월 노량해전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산대첩(1582년 8월)

    세계 4대 해전 중의 하나로 꼽힐정도로 아주 유명한 해상 전투이며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전략인 학익진 전술을 처음 선보인 전투입니다. 몇 대 안 되는 판옥선 만으로 일본군을 유인해 학익진을 펼쳐 눈부신 승리를 이끌어낸 전술이기에 세계 4대 해전에 꼽힐만한 전투였습니다. 학익진 전술은 말 그대로 학이 날개를 펼친 모양의 함대 배열을 통해 포위하고 100 척이 넘는 일본군의 배를 격파했기에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의 피해는 약 6천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였지만 그에 비해 조선군의 피해는 10여 명에 이르는 작은 피해로 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명량대첩(1597년 9월)

    크고 작은 전투들을 거쳐 명량대첩때 이순신은 수적으로 열세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전술을 펼치며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조선군에게는 12~13척의 판옥선만이 남아있는 상태였으나 해남과 진도사이의 명량해협인 울돌목에서 333척의 일본군의 배를 격파시키며 대승을 거둡니다. 이러한 승리는 남서쪽 끝자락에 위치치하는 좁은 해협의 조류의 변화를 이용한 탁월한 전술이었기에 수적으로 우세한 일본 군함을 물리치는 쾌거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노량해전(1598년 12월)

    일본의 총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과 지속적인 일본의 패배로 전의를 상실한 일본군을 몰살하기 위한 이순신 장군의 단단한 결의에 따른 승리라고 볼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쟁이 되고 맙니다. 명나라 수군도 함께 합세하여 일본군을 공격한 이 전투는 노량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싸우기 위해 근거리 싸움인 백병전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200여 척의 왜 척을 침몰시키는 쾌거를 이루어냈지만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게 되는 안타까운 전쟁으로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는 이 말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로 남게 되고 단 한 척의 외척도 돌려보낼 수 없다는 이순신 장군의 굳은 의지가 묻어나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일본의 침략인 임진왜란과 이순신장군의 대표적인 활약 3대 해상 전투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왜세의 침략에 맞선 조선의 저항과 애국심의 상징이며 영웅으로 남았고 임진왜란 시기 내 벌여진 해상 전투는 그의 리더십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스토리로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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