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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집트 왕조 투쟁

    클레오파트라의 왕조 투쟁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내 복잡한 권력 투쟁으로 시작됩니다. 처음 그녀는 아버지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우레테스와 함께 권력을 잡았고 나중에 프톨레마이오스 전통의 관례대로 그녀의 형제들과 함께 이집트를 통치했습니다. 그러나 왕조 내에서 주로 후계자 분쟁, 형제간의 경쟁, 왕좌에 대한 도전, 외국의 개입을 중심으로 내부 갈등을 겪으며 클레오파트라는 형제자매를 제거하기 위한 다양한 전술을 세우게 됩니다. 정치적으로 형제자매를 속이기 위해 조작과 음모의 전략을 세우고 자신의 대의를 지키기 위해 라이벌을 약화시키는데 도움을 준 영향력 있는 신하, 고문, 군사 지도자들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자신의 오빠이자 공동 통치자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전략적으로 추방하고 자신의 통치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형제자매를 암살하게 되는데, 그녀의 여동생인 아르시노어 4세는 클레오파트라와 동맹을 맺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처형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형제자매를 상대로 군사적 충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녀는 오빠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포함하여 무력 충돌의 전투를 벌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형제자매들을 제거하고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내에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적 책략, 동맹등 경우에 따라 폭력과 암살까지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그녀가 통제권을 유지하고 자신이 이집트의 유일한 통치자임을 주장하는데 있어 필수적 요소였던 것입니다. 결국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유일한 통치자로 올라서게 되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후 마크 안토니우스와 같은 강력한 인물들과의 동맹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확고하게 다져나갑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동맹

    클레오파트라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동맹은 그녀의 통치와 이집트 역사에서 중추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기원전 48년 클레오파트라의 형제이자 공동 통치자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 맞서 싸우기 위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지원을 구하면서 둘은 처음 만나게 됩니다. 당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대왕과의 로마 내전에 휘말려 있는 상태로 상호 이익을 바탕으로 정치적 동맹을 맺게 됩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로마의 부와 자원으로서 이집트를 중요한 원천으로 삼게 되고 이에 대한 지배권을 추구하는 잠재적 동맹자로 보았고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를 통해 이집트의 통치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내부 및 외부 위협으로부터 왕국을 보호할 수 있는 기회로 보았습니다. 둘은 동맹기간 동안 특별한 관계로 발전하게 되고 둘 사이에서 카이사리온(기원전 47~40년까지 이집트를 지배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왕)이 태어나게 됩니다. 그녀는 아들의 출산 이후 카이사르와의 깊어진 동맹강화로 로마로부터 중요한 지원을 얻었고 이는 이집트의 지배권을 되찾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왕위 계승권을 지지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기원전 47년 알렉산드리아(이집트 북부 알렉산드리아 주의 지중해 항구도시로서 이집트 카이로 다음으로 큰 도시) 공성전에서 승리를 두게 됩니다. 카이사르가 이집트에서 승리한 후 클레오파트라의 통치자로서의 지위는 확고해졌고 그녀는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스스로를 이집트의 유일한 통치자로 임명하고 로마 팽창주의에 맞서 독립을 유지하는데 카이사르와의 동맹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로마 정치

    클레오파트라는 영향력 있는 로마 지도자들과 동맹을 통해 이집트의 이익을 보호하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기에 로마 정치에서 그녀의 역할은 중요했습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동맹으로 로마 정치에 처음 진출한 그녀는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되며 로마와의 동맹이 위협받게 됩니다. 이때 카이사르의 동맹이자 로마를 통치하는 제2차 삼두정의 일원이었던 마크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죽음 이후 핵심인물로 떠오르게 됩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또 다른 저명한 로마 지도자인 마크 안토니우스와 새로운 동맹을 맺으며 위기를 모면하고 그녀는 안토니우스에게 재정적 자원과 군사 지원을 포함하여 이집트의 지원을 제공했고 안토니우스는 그녀의 통치를 지지해 주며 클레오파트라를 여왕으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안토니우스와의 관계는 그녀에게 로마 정치에 있어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외교 협상과 의사 결정에 함께 참여했으며, 로마에서의 그녀의 존재와 로마 엘리트와의 상호 작용은 정치적 논쟁과 긴장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개입은 결국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고 패배 후 옥타비아누스(훗날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기원전 30년에 이집트를 침공 안토니우스는 이때 스스로 목숨을 버리게 됩니다. 클레오파트라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안토니우스는 그녀를 잡기 위해 혈안이었는데 이를 알게 된 클레오파트라는 독으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영력 있는 로마 지도자들과의 동맹을 맺는 것은 물로 자신의 관계를 활용하여 이집트의 이익을 확보하는 등 로마 정치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해낸 클레오파트라는 결국 그녀의 몰락에 스스로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팽창주의에 맞서 이집트의 독립을 한동안 유지한 노련한 정치가였지만 로마와의 동맹으로 결국 그녀가 죽은 이후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로 합병되게 됩니다. 이후 클레오파트라는 서양과 동양 문화 모두에서 여성의 힘과 유혹의 상징이 되었으며 문학, 예술, 영화에서 불멸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정치는 급변하는 정치 환경 속에서 자신의 권력과 이집트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전략적 동맹과 조작, 야망이 결합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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