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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희빈 또는 장옥정으로 알려진 인물로 조선 왕조의 가장 흥미롭고 논란이 많은 일물 중 한 명이며 한국 역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인물입니다. 숙종(조선의 19대 왕)의 후궁이자 경종(조선의 20대)의 생모인 그녀는 교활한 암투의 끝판왕으로 표현되고 많은 논란의 대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녀를 지성과 순발력으로 조선 궁중의 어려운 세계를 헤쳐나간 여성의 상징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권력을 쥐기 위해 갖은 음모와 암투를 벌인 일들은 비난의 대상인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결국은 폐비되고 사약을 받게 되는 그녀의 기구한 운명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데 왜 온갖 방법을 원해 암투아 음모를 벌여야만 했는지 그녀에 대해 파해쳐 보기로 합시다.

    유일한 평민출신 후궁

    장희빈은 1594년 역관출신의 아버지와 파평윤 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옥정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장희빈의 출생은 이와는 또 다른 내용으로도 존재하는데, 평민의 아버지와 기생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찌하였든 장희빈은 어린 나이 때부터 궁에 들어가게 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장희빈은 머리를 따 올릴 때부터 궁에 들어와 생활했다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린 나이에 나인으로 입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시작된 나인생활은 그녀의 매력과 기품에 반한 조선의 왕 숙종의 눈길을 사로잡으면서 후궁으로 승격되며 꽃을 피우게 됩니다. 하지만 장희빈의 빠른 신분 상승에 어려움이 없진 않았습니다. 그녀는 후궁에 오르면서 다른 후궁들의 극심한 질투에 직면하게 되는데 갑작스러운 권력 상승은 다른 후궁들로 하여금 경쟁의 상대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장희빈은 궁중 정치의 위험한 물살을 능숙하기게 헤쳐나가며 궁정 내에서 강력한 존재임을 입증합니다.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과 계획을 제공하는 동시에 자신의 권위를 약화시키려 드는 이에게는 기교 있게 영향력을 해사 했습니다.

    악녀 장희빈

    장희빈이 숙종에게 영향을 준 가장 중요한 방식은 정치적 개입을 통해서였습니다. 숙종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그녀는 자신의 이익을 지지하는 궁정 내의 파벌들과 협력하여 왕에 대한 영향력을 활용하고 자신의 목적을 진전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궁중 정치 조작을 통해 장희빈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잠재적 경쟁자들을 소외시켜 통치 방향을 효과적으로 조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장희빈의 정식 명호는 옥산부대빈이며 후궁의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인현왕후를 질투하고 음해하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무엄하게도 인현왕후의 질투심을 유발하는 등 지속적으로 인현왕후를 자극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러한 술수에도 왕후의 품격을 잃지 않고 장희빈에게 빠져 사랑에 눈이 먼 숙종과 그러한 사랑으로 눈에 뵈는 게 없는 장희빈의 오만 방자함을 그저 참아 냈야 했을 겁니다. 그렇게 숙종의 애정을 듬뿍 받아오던 장희빈은 1688년 10월 왕자를 출산하게 되며 내심 후사가 없어 걱정하던 숙종은 더욱더 그녀를 아끼게 됩니다. 이듬해 숙종은 왕자를 원자(왕위계승권을 갖게 되는 것)고 발표하게 되고 궁녀 출신의 후궁의 소생을 원자로 삼을 수 없다는 왕가와 신하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됩니다. 결국 이러한 반대에도 숙종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왕자를 무리하게 원자로 정하고 장옥정은 희빈(정1품)에 오르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 숙종은 끝까지 숙종의 뜻에 반대하는 원로대신들은 유배를 보내고 숙종을 지지하는 원로대신들로 채워가며 정계개편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인현왕후를 장희빈은 모함하기 시작하는데 질투에 눈이 먼 중전으로 표현되는 등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모함에 몰린 인현왕후는 1689년 폐위되고 궁궐에서 쫓겨나게 되고 와동시에 장희빈을 왕비로 삼겠다는 숙종의 전지가 내려지지만 원로대신들의 반대로 그리되지는 못합니다.

    신데렐라의 몰락

    장희빈에 대한 숙종의 각별한 사랑은 언젠가는 식게 되는 법 무수리 출신의 최 씨가 승은을 입게 되면서부터 숙종의 애정이 소원해지기 시작합니다. 이에 장희빈은 회임한 최 씨를 고문하기에 까지 이르게 되고 그 와중에 인현왕후의 폐출에 대한 민심이 나빠지자 1694년 숙종은 갑술환국(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장악한 남인이 인현왕후의 복위 문제와 관련하여 대거 축출당하고 다시 서인이 집권한 사건) 하며 인현왕후는 복위 되게 됩니다. 인현왕후의 복위와 함께 장희빈은 정1품에서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고 이러한 처사에 장희빈은 앙심을 품게 됩니다. 신당을 차려 인현왕후를 내몰기 위한 굿판부터 짚으로 만든 인형에 바늘을 꽃 거나 이 인형을 인현왕후 처소 밖에 몰래 묻어 두거나 초상화에 활을 쏘는 등 다양한 저주 행위를 합니다. 이러한 주술 행위 때문인지 복위 이후 크고 작은 종기들로 고생하기 시작하며 인현왕후의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하고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인현왕후의 죽음을 두고 고문 투기사건으로 앙심을 품은 최 씨는 숙종에게 장희빈의 저주굿에 대해 고하게 되고 숙종은 장희빈에게 결국 사약을 내려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조선의 신데렐라 버전인 장희빈의 삶은 수세기동안 문학, 드라마, 대중문화에서 불멸의 존재처럼 많이 다뤄졌습니다. 1961년 김지미 주연의 영화부터 1981년 MBC 드라마 여인열전의 장희빈, KBS에서 제작 방영된 2002년 김헤수 주연의 드라마 등 여러 차례 그녀의 삶의 이야기는 계속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청중을 매료시키고 궁중 여인들의 투기에 대한 복잡성과 투쟁을 엿볼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녀의 인생은 결국 비극으로 끝났지만 한편으로는 지속적인 야망과 열정의 증거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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