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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영광 영토 정벌

    도전과 야심 찬 군사 작전으로 고구려의 영토 확장에 성공한 광개토대왕 한국사에 있어 많은 업적을 남긴 왕 중의 하나로 남겨져 있습니다. 그의 활약으로 고구려는 넓은 영토와 문화적 발전을 이루게 되지만 모두 광개토 대왕대에 이루어졌다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선대인 고국원왕(고구려 제16대 왕)이 백제에 패하며 전쟁터에서 전사하게 되는 것을 시작으로 소수림왕은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고자 나라를 안정시키고 중국과의 관계 또한 잘 다지게 됩니다. 결국 국력을 키우고 강화시킨 이 기초는 고국양왕(고구려 제18대 왕)과 광개토 대왕에게 까지 영향을 주었던 것입니다.

    광개토 대왕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1제 8대 왕인 고국양왕의 아들로서 이름은 담덕이라 합니다. 담덕은 374년에 고구려 국내성 고이련에서 태어났으며 태자로 책봉된 이후 391년 아버지를 이어 고구려 제19대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왕의 자리에 오른 후 선대 왕인 소수림왕과 아버지인 고국양왕의 영향으로 국토 정벌을 계속 펼치게 되는데 남쪽의 백제, 북쪽의 연 나라등으로 고구려의 영향력을 넓혔으며 주변 나라들은 승승 장구하는 고구려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선대부터 이어진 국토 정벌은 광개토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왕권을 이어받아 서도 계속되었고 고구려는 풍족하고 부강한 나라로서 입지를 다지게 됩니다. 광개토 대왕이 큰 업적을 남기기는 했으나 그의 삶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18살에 왕의 자리를 이어 나라의 번영에 끊임없는 전투로 몸 바쳐서였는지 그는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이 왜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는지에서는 사실상 정확한 정보가 없는 것이 의문이기는 하나 '광개토왕릉비분'에 새겨진 글을 보자면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자 백성이 모두 생업에 힘쓰고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풍족해졌으며 온갖 곡식이 가득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나 보다.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국사의 알렉산드로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태자 시절부터 아버지인 고국양왕과 전쟁터를 누비며 제왕 수업을 받은 광개토 대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활발한 정복 전쟁을 벌여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확장해 나갔습니다. 그는 남쪽으로 위치한 백제를 공격하여 10개의 성을 빼앗고 전략적 요충지인 관미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이어서 구곡성을 공격하여 수천이 넘는 포로를 잡아들이고 임진강을 거쳐 한강 북쪽까지 거침없이 진격하여 58개의 성을 차지하였습니다. 이때 광개토 대왕은 아신왕(백제의 왕)에게 항복을 받게 되고 아신왕의 동생과 신하 10명을 인질로 잡아들이게 됩니다. 이에 아신왕은 치욕을 갚고자 신라를 먼저 공격하기로 결심하게 되고 왜(현재의 중국)와 가야를 끌어들여 신라의 도성으로 진격하게 됩니다. 광개토 대왕은 5만의 군사를 신라에 보내게 되고 신라군과 합세하여 백제와 외의 연합군을 모두 몰아냈습니다. 이렇게 백제제를 평정한 뒤 광개토 대왕은 북쪽에 위치한 요동땅을 향하게 되고 이때 고구려는 모용 씨의 후연(중국 5호 16국의 하나, 384 ~ 409년)과 국경을 사이에 두고 전쟁을 거듭합니다.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하는 동안 후연은 남소성과 신성을 공격하며 고구려의 700리의 땅을 빼앗았는데 광개토 대왕은 이에 맞서 공격해 요동 땅을 되찾게 됩니다. 그 후, 광개토 대왕은 북연(고구려 왕족출신의 고운이 왕위를 찬탈하고 건국한 국가, 407 ~ 406년)과 외교 관계를 맺어 후연을 견제하고 후연이 멸망하면서 요동 지역을 확고하게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광개토 대왕의 정복 활동은 멈추지 않았고 그가 재위하는 동안(391 ~ 412년)에는 서쪽으로는 요동, 북쪽으로는 개원과 영안, 나아가 동쪽으로는 혼춘과 남쪽으로는 한강 이북까지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즉위 후 평양에 위치한 사찰(총 9개)을 짓고 불교를 전파하는데 힘을 기울였으며 정치 질서를 바로 잡는 데에도 노력하였습니다. 한국사의 알렉산드로스라 불리기까지 하는 광개토 왕은 큰 업적을 남긴 왕으로서 대왕이라는 칭호까지 함께 불리고 있는 역사적인 인물로 한국사의 한편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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