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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와 사도세자

    본명이 이순인 사도세자는 한국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결말의 주인공으로 그의 삶과 죽음까지의 이야기는 많은 영화나 드라마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사도세자는 왜 비극적인 인물로 기억되는지 어린 시절부터 그의 마지막까지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조는 조선왕조 21대 왕으로서 1724 ~ 1776년을 재위하였는데 이는 조선 역대 왕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던 왕으로 기록됩니다. 본래 영조는 어머니의 출신이 미천했던 관계로 숙종의 후궁이었던 영빈 김씨의 양자 노릇을 하였으며 노론의 지지를 얻어 세자의 자리까지 오르고 1724년 경종의 죽음에 따라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탕평정책(붕당의 대립을 막기 위해 골고루 인재를 등용한 정책으로 영조와 정조가 이를 펼침)을 적극 구사하여 국정 안정에 힘썼던 왕이었습니다. 영조의 업적은 이뿐만 아니라 균역법(군역을 균등히 하는 법)을 실시하는 등 국정 운영을 위한 제도 개편과 문물 정비에 노력하였고 민생 안정에 힘쓴 왕이었습니다. 사도세자는 1735년 영조와 혜경부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왕족의 신분에 걸맞게 유교, 고전, 문학, 역사, 예술등 다양한 교육을 받았으며 영조의 후계자로서 왕위에 오를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사도세자는 14세의 나이로 어머니인 혜경의 조카딸인 혜경원씨와 혼인하게 되고 훗날의 왕인 정조를 포함해 여러 명의 자녀를 낳게 됩니다.

    사도세자의 어린 시절

    영조는 나이가 먹도록 아들이 없어서 근심하던 터였습니다. 그 당시 42세에의 나이는 상당히 많은 나이였으며 사도세자의 탄생은 정말 기쁜 일이었습니다. 또한 총명함을 보인 사도세자는 당시의 엄격한 유교적 위계와 관습 속에서 성장하였는데, 왕족의 신분에 걸맞은 교육을 다각도로 받으면서 문학, 역사, 예술뿐만 아니라 무술과 정치술에 대해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사도세자는 특히 아버지 영조와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어릴 적의 총명함으로 영조의 사랑과 편애를 듬뿍 받게 됩니다. 왕위 계승자인 사도세자는 아버지로부터 관심과 애정을 받고 미래 조선의 통치자로서 영조는 희망과 열망을 가지게 되며, 아들의 교육과 양육에 개인적인 관심을 쏟기 시작합니다. 영조의 지나친 사랑과 관심은 점차적으로 무리한 기대로 연결되게 되고 이를 어린 사도세자로서는 모두 수용하기 힘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반면 어머니인 혜경부인은 사도세자의 성장기동안 따뜻한 지원과 지도를 아끼지 않으며 양질의 교육에 힘쓰지만 점차적인 영조와 사도세자의 마찰을 막지는 못합니다. 영조의 초기 편애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압력과 왕실 내 갈등으로 인해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는 더욱더 긴장되게 시작했습니다. 영조는 경쟁 세력의 도전에 직면했고 복잡한 권력 투쟁을 헤쳐 나가야 했는데 이는 사도세자와의 상호작용에 악영향을 주게 되고 갈등은 고조됩니다.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와의 갈등과 오해는 더해지게 되고 국정, 정책, 개인 행위 등의 문제를 놓고 의견 차이와 충돌이 있었던 기록도 있습니다. 사도세자가 13~14세 즈음 영조의 잦은 질타와 꾸짖음은 아동학대급이었으며, 15살 때는 대리청정(군주가 병이 들거나 나이가 들어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을 때 권력이 있는 다른 자가 정사를 돌보는 것)을 하는 것으로 사도세자를 옥죄입니다. 사도세자는 날씨가 흐린 날이면 "세자가 덕이 없어서 그렇다"며 꾸짖는 등 점차적으로 아버지인 영조를 만나는 것이 그에게는 고역이었을 것입니다. 사실상 아버지로부터의 정서적 학대를 받으며 자란 사도세자의 삶은 병적인 정신증세로 결과를 보입니다.

    비극적 종말

    영조로부터의 다양한 정신적 학대를 받으며 자란 사도세자는 사실상 강박과 정신병증에 시달린 것으로 보입니다. 승정원일기나 한중록 기록에 따르면 그의 광증은 살인과 고문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후대에 악평을 받을 것을 각오하고 아버지의 폐악적인 기록을 승정원일기에서 삭제하기도 했던 걸로 알려지고 있으며 남겨진 기록만으로만 봐도 중관, 내관, 노속, 나인을 비롯해 많은 이들을 죽이거나 고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중록의 기록으로 사도세자의 행적을 현대의학자들이 분석한 결과 양극성 장애라는 증상고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사도세자 생애의 비극적인 결말은 일련의 사건을 통해 전개되었는데 1762년 초 왕실 신하들의 죽음과 관련된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혐으로 기소되게 됩니다. 그러면서 영조는 혐의에 대한 조사를 지시하며 사도세자의 행동을 집중적으로 확인하기게 이르고 아들을 엄벌하기로 결정합니다. 사실 이전 사도세자가 반역을 꾸민다는 소문과 8가지의 잘못을 적은 상소가 올라오자 영조는 크게 노하며 사도세자의 계급을 평민으로 내리게 됩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인 영조를 비롯 장인 장모에게 까지 철저하게 고립되고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자결하라 말합니다. 그러나 끝내 자결하지 않자 1962년 6월 10일 영조는 사도세자를 나무뒤주에 가두게 하고 8일 후 갈증과 굶주림으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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