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반응형

    고구려 7세기 제28대 왕인 보장왕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지만 연개소문의 반란으로 왕의 자리에 올랐기에 연개소문이 살아 있는 동안 왕으로서의 권력을 크게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영화 관상에서 강렬한 인상으로 등장하는 연개소문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6세기 후반 고구려에서 두각을 나타낸 강력한 군사 지도자이며 보장왕 때 섭정으로 사살상 나라를 통치한 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반란의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연태조(고구려의 귀족이자 최고위 정치인)의 장손으로서 594년 고구려 동부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의협심이 강했던 그였으나 신하들은 그런 그를 견제하기에 바빴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어렵게 자리를 이어받게 됩니다.  그 뒤, 연개소문은 영류왕(고구려 제27대 왕)의 명령으로 천리장성(압록강에서 원산만까지의 북쪽 변경에 쌓은 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견제하는 신하들은 여전히 많았으며 연개소문을 제거하기 위한 움직임을 은밀히 논의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를 알아챈 연개소문이 선수를 치게 되는데 군사들내에 도는 열병을 핑계로 영류왕과 그를 견제하는 신하들을 성 남쪽으로 유인하게 되고 미리 남문에 배치해 둔 군사들과 함께 모두 몰살시키게 됩니다. 그 후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조카를 추대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고구려 제28대 보장왕입니다. 대막리지(고구려의 최고위직)의 자리에 올라선 연개소문은 도교(유교와 달리 신비주의적인 사상을 추구)를 들여와 새로운 세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으며 영류왕 때 굴욕적이었던 당나라와의 외교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외교 관계를 확립하였습니다. 이것을 빌미로 당나라 태종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왔지만 안시성(고구려와 당나라의 경계에 있던 성)에서 연계소문에 의해 패하게 됩니다. 이후에도 잦은 침략이 있었지만 매번 승승장구하게 되지만 연개소문이 죽은 뒤 집안의 분열로 고구려는 당나라에게 평양성을 내어주고 결국 역사 속으로 고구려는 사지지게 됩니다.

    당나라에 대항한 연개소문

    연개소문과 당나라의 갈등은 삼국시대 역사서인 '삼국사기'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고구려의 강력한 군사지도자인 연개소문은 6세기말과 7세기 초에 당나라와 충돌하게 되고 주로 영토 분쟁과 전략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싸움을 지속합니다. 삼국중 하나인 고구려는 한반도와 만주의 일부 지역을 점령하여 이 지역에서 당나라의 팽창 주의 야망에 위협이 되었습니다. 고구려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연개소문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영토를 수호하고 독립을 주장하기 위해 당나라 군에 맞서 군사 작전을 주도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전략적 거점과 무역로를 장악하기 위해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였던 것입니다. 당나라의 막강한 군사력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연개소문의 리더십과 고구려 군대의 강력함은 당나라의 지속적인 돌발에 흔들리지 않고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의 갈등은 수년동안 지속 되었고 연개소문의 죽음에 대해 다소 정확하지는 않지만 독재적인 통치와 가혹한 정책이 많은 이들로 하여금 반감의 씨앗을 품게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 반대파의 음모로 점점 커지는 연개소문의 영향력이 고구려 정치 체제에 위협이 된다라는 이유로 암살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천리장성의 책임자

    고구려 막리지의 관직을 세습받은 연개소문은 천리장성의 축조 책임자로서 중앙정계에 발을 들일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천리장성은 언제 있을지 모르는 당나라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쌓아진 성이며 이성을 완성하기까지는 무려 16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비사성에서부터 시작되어 부여성까지 이어지는 천리장성은 외세로부터 고구려를 보호하였습니다. 그 말인즉슨 천리장성은 연개소문 이전부터 쌓아지기 시작했다는 말이며 631 ~ 647년 동안 약 6미터의 너비와 3미터가량의 높이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631 ~ 642년까지 연개소문의 관리 감독하에 천리장성은 지어졌고 645 ~ 647년 당태종이 천리장성을 완성시키게 됩니다. 천리장성을 영류왕때 쿠데타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연개소문이 반란을 일의 키는 중요한 현장으로 사용되었는데 영류왕과 100여 명의 대신들을 이곳으로 유인해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를 맞이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연개소문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666년(보장왕 25년) 사망하게 됩니다. 연개소문이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가 세상을 떠난 2년 후 고구려의 화려한 시대도 마감되게 됩니다. 당의 침략에 맞서 고구려를 지켜낸 연개소문은  호족 공화제라는 구제도를 타파 정권을 통일하고, 남수서진 정책 등을 펼친 장본인으로서 임금을 시해하는 쿠데타의 중심인물로 반역의 대명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능력은 후대에 그의 쿠데타와 함께 반대로 평가받는 업적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