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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황후 민자영은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과 결혼하여 명성황후가 되었습니다. 황후로서 그녀는 궁정 정치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특히 일본의 엄청난 외부 압력 기간 동안 한국의 근대화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명성황후가 황후자리에 있는 동안 그녀는 한국을 현대화하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 주권을 주장하려는 노력을 해왔으며 그로 인해 조선의 중심인물 중 하나로 서게 됩니다.
출생부터 황후가 되기까지
조선 고종의 왕비인 명성황후는 대한제국의 초대 책봉 황후이며 1851년 경기도 여주목(현재의 여주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여흥 민 씨의 가문에서 부친인 민치록(인현왕후의 오빠이자 훗날 영의정)과 한산 이 씨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게 되며 이름은 민자영으로 불려지게 됩니다. 아버지로부터 학문의 가르침을 받으며 어릴 적 소학등을 즐겨 읽고 역사에 밝아 전고나 치란을 읽혔다고 합니다. 효녀로도 잘 알려져 있는 명성황후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게 되는데 그녀의 나이가 겨우 9세였으며 이전부터 아버지를 지극히 간호하였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어린 명성황후인 민자영은 어머니와 함께 인현왕후의 사가인 감고당으로 옮겨가 생활하며 성장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유년기를 보낸 그녀는 대왕대비 조 씨가 금혼령을 내리며 1866년 16살의 나이로 왕비 간택에 참여 최종적으로 삼간택에 뽑히게 됩니다.
흥선대원군 과의 대립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와 고부간으로서 명성황후를 직접 간택한 인물 중 하나이다. 어린 고종을 대신해 국정을 이끌었던 흥선대원군은 개화 정책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서 선진 문물을 수용하는 근대화에 힘썼습니다. 대한제국의 건국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서 폐쇄적인 조선에서 벗어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고부간의 갈등이 있었는데 고종을 대신해 국정을 이끄는 흥선대원군의 섭정 때문이었습니다. 1873년 최익현(대한제국의 정치가이며 독립운동가)이 이에 대한 상소를 올리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슬러 명성황후가 입궁당시 이미 고종의 총애를 받던 귀인 이 씨가 출산을 하게 되고 이에 이 씨는 더욱더 왕의 총애를 받게 됩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명성황후는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흥선대원군에게 축출되었던 조대비의 측근들 그리고 그와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던 흥인군, 서원철폐에 불만을 품고 있는 최익현과 손을 잡고 흥선대원군과 대립하게 됩니다. 상소를 올린 최익현은 해임을 당하게 되지만 명성황후의 지원으로 여러 차례 위기를 모면하게 되고 그녀의 도움으로 호조참판의 자리에 까지 오르게 됩니다. 이렇게 명성황후의 도움으로 호조참판의 자리에 올라선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리게 되며 11간의 흥선대원군의 섭정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1871년 명성황후는 첫째 왕자를 출산하였으나 며칠 만에 죽게 되고 1873년 둘째 아들 이 척(순종)을 낳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 명성황후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흥선대원군의 움직임은 계속되었습니다. 명성황후의 측근을 제거하기 위한 움직임을 계속해왔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명성황후의 견제는 더욱더 그를 옥죄어 들기 시작했습니다. 개화파를 배제하려는 명성황후의 움직임으로 인해 더욱더 관계는 나빠지게 되고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견제에도 끊임없이 정게 복귀를 시도하게 하며 그녀를 폐위하기 위한 움직임도 있었으나 번번이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다 정부가 밀린 임금 대신 불량한 쌀을 지급하며 일어난 난으로 흥선대원군이 일본등 서양 세력에 대한 배척운동으로 확대시킨 임오군란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로 인해 명성 황후는 궁을 빠져나와 은신하게 됩니다. 이때 명성황후는 목숨은 건지게 되지만 그녀의 많은 측근들은 죽게 되고 명성황후는 청(중국 최후의 통일 왕조) 나라의 도움으로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한 후 한성을 장악 후 궁에 다시 입궁하게 됩니다.
명성황후의 죽음
입궁 후 명성황후는 개화파를 정권에서 배재하며 정책을 펼치게 되며 개화파는 이러한 탄압에 대항하기 위해 거사를 준비하게 됩니다. 갑오경장(1894년 근대화 개혁) 때 흥선대원군은 다시금 명성황후와 고종의 폐위를 준비하고 명성황후는 개화파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이렇게 서로 간의 견제는 계속되며 흥선대원군은 일본 측과 협력하게 되고 1895년 조선은 일본의 점령을 받게 됩니다. 그로 인해 흥선대원군 또한 일본군의 견제를 받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같은 시기 급진 개화파인 박영효에 의해 명성황후의 암살 계획이 세워집니다. 황후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우려한 이 암살계획은 1895년 7월로 암살일정을 계획하고 일본에 병력을 요청하게 됩니다. 명성황후의 암살 계획에 대한 정보를 유길준(조선후기 외교관)을 통해 고종에게 알려지게 되고 이를 알아차린 박영효 일당은 도성 밖으로 달아나게 됩니다. 그러다 1895년 8월 20이본군 측은 암살 작전에 돌입하게 되고 명성황후를 시해할 낭인들이 궁에 잠입하게 됩니다. 그렇게 잠입한 낭인들에 의해 명성황후는 43세의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결국 이로 인해 흥선대원군은 장남인 완흥군을 궁 내부대신에 앉히고 다시금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일본과 조선의 협력자들에 의해 한 나라의 국모가 시해된 이 만행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게 되지만 명성황후의 견해에 대한 엇갈린 의견들이 많습니다. 명성황후와 고종은 국고를 탕진하는 한편 외척의 편중된 권력을 통해 임오군란등의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황후임은 물론 명석함을 겸비한 지적인 여성으로 기억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