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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해군은 한국 조선 왕조의 15대 군주로 1608년부터 1623년까지 조선을 통치하였습니다. 광해군의 통치 기간은 정치적 혼란과 내분의 역사로 남겨져 있으며 종종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았던 시기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는 앞전에 제가 다룬 백성을 사랑한 세종대왕과는 사뭇 다른 역사의 록을 남기게 됩니다. 이번 포스팅은 그의 발자취에 대해 다뤄보고자 합니다.

    광해군의 발자취

    광해군의 출생과 사망은 1575 ~ 1641으로 선조의 둘째 아들이며 본명은 이혼입니다. 조선왕조 제15대 왕으로 광해군은 1608년 아버지 선조가 사망한 후 즉위하여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영창대군과의 갈등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그를 서인(아무 벼슬이나 신분적 특권을 갖지 못한 일반사람)으로 삼게 됩니다. 또 인목대비를 서궁으로 유배시키는 선택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서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의 킵니다. 광해군의 통치는 정치적 파벌주의와 외부 위협을 포함한 즉각적인 도전에 직면하게 되는데, 조정 내 여러 세력 간의 정치적 내분으로 인해 통치를 망치게 됩니다. 결국은 정치적 음모와 파벌주의가 광해군의 통치에 큰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일본과의 갈등문제도 있었습니다. 광해군 재위기간 동안 한국은 특히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임진왜란동안 일본군의 침략을 받게 되는데 이러한 침략의 여파는 조선 왕조에 문화적, 경제적 악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614년 결국 광해군은 폐위되고 그의 아들인 인조가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광해가 왕위에서 물러난 결정적인 이유는 당파와의 갈등을 포함한 정치적 책략의 영향으로 폐위가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광해군은 평민으로 강등되게 되고 여생을 그렇게 평민으로 마감하게 됩니다.

    역사의 오명

    광해군의 통치는 역사가들에게 여러 가지 도전과 논쟁거리로 이야기되고 있으며 그의 재임기간 동안 특정 행동과 이해할 수 없는 정책에 대해 지적되고 있습니다. 광해군이 행한 행위에 대해 비판을 받는 몇 가지 측면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정치적 숙청과 파벌주의로 광해군은 자신의 통치에 위협이 된다고 인식되는 정치적 반대자들과 관리들을 숙청하는데 거침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숙청은 왕실 내에서 광범위한 파벌 투쟁의 일부였으며 정치적 불안과 의심의 분위기를 조장했습니다. 두 번째, 임진왜란 이후 정책으로 전쟁 이후 나라를 재건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한 광해는 정치적 숙청과 파벌주의를 지속해 오는 입장에서 제대로 된 나라 재건에 힘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더욱더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세 번째, 인목왕후 폐위와 김씨비의 처형으로 광해군은 인목왕후의 폐위와 김씨비의 처형을 지시함에 있어 가혹한 처사를 보였고 폭군 광해군이라는 호칭이 붙여진 계기가 이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과론적으로 정치적 음모에 연루되어 인목왕후는 폐위되고 김씨비가 처형된 광해군의 처사는 그의 평가에 부정적 영향을 준 것은 확실합니다. 네 번째, 중국 즉 명나라와의 관계에 있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많은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과 달리 광해는 중국 명나라와 긴장된 관계를 지속해 왔습니다. 중국에 대한 조공 사절단을 보류하거나 더 큰 독립을 주장하기도 한 그의 결정은 명나라 조정의 반대를 받아 외교적 긴장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광해군은 재임기간 동안 불안, 당파주의, 숙청 등 비효율 적인 통치의 결과물로 자주 인용되고 있습니다. 그의 통치는 정치적 의견 합치가 부족하였고 한국 역사의 어려려운 시기에 안정적인 정치를 펼치지 못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결국 광해는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되는 치욕의 결과로 조선왕의 시대를 마감하게 됩니다.

    가려진 업적

    그렇다면 광해군은 그저 폭군이라는 오명의 정치만을 해오다 폐위당한 것인지 광해군의 긍정적 발자취에 대해서도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부 여론으로는 세조(조선의 7대 왕 수양대군)에 비하면 광해군을 폭군으로 몰아간 측면은 다소 지나친 평가라는 말도 있습니다. 광해군의 업적을 본다면 문화 예술에 대한 공헌 일 것입니다. 광해군은 통치 기간 동안의 어려움 속에서 문화 예술 활동 등을 지원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는데 문학, 서예, 예술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을 보입니다. 서적 간행에도 노력을 기울여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국조보감, 선조실록을 편찬하였습니다. 폐위 전까지는 대동법과 양전을 실시하여 민생 안정에 힘썼으며 임진왜란으로 폐허가된 한성부의 질서 회복을 위하여 창덕궁 중건, 경희궁과 인경궁을 준공하는 것에 힘썼습니다. 광해군의 조선사는 흔히 격동의 시기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가 왕좌에서 물러난 것은 중요한 순간으로 광해군 이후의 통치자들은 정치적 상황을 안정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펼치게 됩니다. 결국 광해군의 통치는 외부 위협과 내부 갈등의 시대에 조선 왕조가 직면했던 문제이기도 했다는 맥락에서 이야기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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